여행 스케치/베트남

베트남 호치민 자유 여행 코스 : 베트남 전쟁 박물관 : 호치민 전쟁 박물관

꿈나무 여행작가 2024. 8. 13.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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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이 일어나게 된 원인

(베트남 전쟁의 역사적 배경)

 

인도차이나 반도에 위치한 베트남은 19세기 중엽부터 라오스, 캄보디아와 더불어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역사적으로 베트남 민족은 중국과 몽고와 중국의 침략에도 끈질기게 맞서 싸우며 오랫동안 독립을 유지했고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도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일본군의 침략으로 잠시 물러났던 프랑스는 1946년에 다시 돌아와 남베트남에 임시정부를 세웠고 베트남 독립운동을 이끌던 호치민은 북베트남에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세우게 되었다. 
그 이후 호치민이 이끄는 북베트남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를 크게 이겼고 프랑스는 1956년 7월 베트남 전역에서 총선거를 하기로 약속을 하였지만 프랑스는 약속과 달리 1956년 4월에 베트남에서 철수를 하고 그 대신 미국이 베트남에 개입하게 되었다. 
미국은 응오딘지엠을 앞세워 남베트남에 반공 정권을 세우고 군대를 보내 도와주었지만 응오딘지엠 정부는 부패와 독재를 거듭해 남베트남 민중은 정권에 불만에 쌓이게 되었다. 
1960년 12월에 "베트콩"이라고 불리는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이 결성되어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아 남베트남 정권과 싸워나가면서 남북의 두 베트남 정권 사이에 긴장감이 높아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64년 8월, 미국 해군 구축함 두척이 통킹 만에서 북베트남군의 공격을 받은 "통킹 만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고 미국은 곧바로 북베트남에 보복 공격이 일어나면서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베트남 전쟁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 ; 

베트남 전쟁박물관

 

베트남 전쟁 은 1975년 사이공 최후의 날을 끝으로 종전이 된 10여년에 이르는 전쟁이었다.
베트남 전쟁 기간 중 3백만 명 사망, 2백만 명 부상, 30만명 실종... 막대한 인명피해와 경제적 손실을 가져왔다. 
베트남 전쟁박물관 은 미국과의 전쟁 이후 통일을 이룬 1975년 9월에 개장하였고 개관 당시에는 "미국 전쟁 범죄 박물관"으로 불렀다가 최근에 전쟁 잔존물 박물관 , 베트남 전쟁박물관으로 이름을 변경했다고 한다.

 

 

아이들과 함께한 베트남 가족 여행, 호치민 자유 여행에서 호치민 시내 관광하며 찾아간 곳이다. 
호치민 여행 에서 가장 인상깊고 여운이 많이 남는 호치민 여행 코스인 베트남 전쟁박물관에서 의미있는 시간을 가졌다. 

호치민 베트남 전쟁박물관은 3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야외 전시장도 무척 넓었다. 
우리나라의 용산 전쟁기념관처럼 야외전시장에는 베트남 전쟁 당시 실제로 사용했던 탱크, 비행기와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입구에 있는 대나무

 

 

베트남 전쟁박물관 입장료는 어른은 40,000동 아이는 20,000동... 
원화로 환산하면 2,000원, 1,000원 정도..
입장료는 저렴한 베트남 물가에 맞게 저렴했다. 

 

 

전시실 입구에 들어가면서 부터 마음이 가볍지가 않다. 
우리나라도 비슷한 전쟁의 아픔을 겪었기에...

나는 전쟁을 겪은 세대가 아니었지만... 
나의 두 아버지인 아버지와 시아버지...
두 분의 아버지 중 한 분은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서 20대의 젋은 아버지를 잃으셨고...
나머지 한 분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에 20대 젊은 경찰서장 아버지를 잃으셨다. 

나에게 있어 두 분의 할아버지께서는 각각 다른 이념에서 희생된 분... ㅠㅠ 
한 분은 유해 조차 찾지 못했고... 한 분은 국립묘지에 묻혀 계신다. 
전쟁은 그렇게 남겨진 사람들에게 잊을 수도 씻을 수도 없는 아픔을 남기는 무서운 일인 것이라는 것을 두 아버지를 보며 느끼며 살았다.

 

전시실 입구에 있는 전쟁의 참상이 담긴 조형물

 

대공포탄

 

미사일처럼 조준사격하는 것이 아니라 원거리 하늘에 쏘는 탄이라고 한다.

 

 

사진과 전시물을 보는 아이들...
무기 전시물이 신기한 막둥이 표정은 마냥 해맑기만 하다. 

 

 

윤봉길 의사의 물병 폭탄처럼... 폭탄을 실제 물건에 넣어 위장한 폭탄들.. 위장폭탄전시물

 

 

미군이 썼던 M1911 권총과 볼트액션 저격총 M1개런드 소총도 전시 되어 있고.

 

 

원거리에서 중거리 포격을 위해 쓰는 박격포도 전시 되어 있다. 

 

M60 머신건

 

당시 미국에서는 발사 속도가 가장 빠른 무기였다고 한다.
1호는 전쟁 무기에 대해서도 아는 게 많아서....
베트남 전쟁박물관에서도 훌륭한 도슨트였다. 

 

탱크포탄과 박격포탄

 

베트콩을 공격하기 위해 미군이 쓰던 지뢰들

 

미군의 군장한 모습을 재현한 마네킹.

 

미군의 휴대용 자동 화기

 

바주카포 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로켓대전차포

 

미군 보병이 사용하던 총들

 

적의 벙커를 공격하기 위해 쓰던 유탄발사기와 지정사수소총

 

미군 보병들이 주로 들고 다녔던 M16 시리즈

 

 

베트남 전쟁박물관의 도슨트.... 1호...
몇 시간을 설명해도 지치지도 않는지 설명도 참 재미있게 한다.

 

대전차 로켓포와 머신건

 

 

왼쪽 지뢰는 발목 지뢰로 적의 무릎 밑까지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지뢰이고 오른쪽 지뢰는 대전차 지뢰로 적의 이동수단을 파괴하는 지뢰라고 한다. 

 

 

포탄이 바닥에 떨어져 폭발해 생긴 파편들.. 
저 파편 하나하나의 무게도 어마어마하다고 한다.

 

 

베트남전 당시 미군이 고엽제를 살포한 곳(빨간색 부분)

 

 

베트남전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들 이 떄 미국이 베트남전에 사용했던 폭탄의 수가 태평양 전쟁 당시 사용한 폭탄의 양보다 몇 배는 많다고 한다. 
물론 기술의 발전도 있었지만 태평양과 배트남의 면적 차이를 보면 어마어마한 양이라고 할 수 있다.

 

폭격으로 무너진 베트남 도시의 모습이 담긴 사진

 

 

베트남전의 참혹함을 보여주는 사진들...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모습도 담긴 사진들이라 가까이서 볼 수도 없었던 사진들... 

 

 

한국이 미국의 요청으로 약 31만명의 군대를 보냈다는 내용.

 

 

종군 기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전쟁의 참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신문과 텔레비전을 통해 베트남 전쟁의 잔인한 장면들을 지켜본 미국인들은 당시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전쟁이 치열해질수록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도 종군 기자들의 이러한 노력 덕분인 것 같다.  

 

베트남 전쟁 당시 종군 기자들이 찍은 사진들

 

 

주인잃은 철모와 총... 
가슴 먹먹하게 만드는 사진...

 

 

베트남전의 참상을 담은 사진 중 가장 대표적이고 베트남전 종전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 속 알몸으로 뛰어가고 있는 소녀의 이름은 판티 킴푹...
1972년  사이공의 작은 마을에 미군은 한 번 떨어지면 광범위한 지역을 불태워 버린다는 네이팜 탄을 투하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일상을 보내던 킴푹은 갑자기 발생한 화재로 온 몸에 불이 붙고 옷이 다 타 버려 온몸에 화상을 입고 뛰어가게 됐다고 한다. 
이 모습을 AP통신기자 닉 우트가 찍게 되었고 다음 해인 1973년 이 사진으로 퓰리쳐상 을 받게 되었다.

 

미군이 참호에서 싸우는 모습

 

 

고엽제로 인해 말라 죽은 나무들의 모습.
게릴라 전을 펼치는 베트콩....걸리적 거리는 밀림을 제거하기 위해 고엽제를 살포한 미군.
고엽제의 강한 독성은 농작물을 오염시키고 기형아를 낳게 하였다. 

 

고엽제의 독성으로 인해 발생한 기형아의 모습. ㅠㅠ

 

 

고엽제의 주된 성분인 다이옥신의 생산 시설 모형.. 
우리나라 미군이 떠난 용산, 인천부평 등지의 미군부대 자리에도 다이옥신과 기름 등으로 인한 토양오염이 심각한 상태였다.  
다이옥신은 850℃ 이하로 소각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건데..
문제는 화학적으로 매우 안정해서 배출된 다이옥신은 자연에서 분해가 되지 않는다. 
1,000℃ 이상의 온도로 인위적으로 열분해해서 제거를 해야하는데....

 

 

고엽제, 고통의 대물림.

 

당시에는 다이옥신, 고엽제에 대해 알려진 바 없었기에 고엽제의 피해를 고스란히 고통으로 안아야했던 사람들... 
사산된 태아, 팔, 다리, 손가락 등이 미처 덜 자란 상태에서 태어난 고엽제 피해 후손들.... 
그 고통들은 전쟁 통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그리고 그 후손들에게 대물림되어 이어져 오고 있었다.

고엽제 피해 사진을 보다가 울컥 해서 바로 옆 기념품샵에 들어갔는데... 
그 곳에서 고엽제 피해 후손으로 보이는 손가락 마디가 다 없는 소녀가 편치 않은 몸으로 구슬을 꿰서 액세서리를 만드는 것을 보다가 결국 눈물이 쏟아져 뒤돌아 나와버렸다. ㅠ 

이 뿐만 아니라 "밀라이 학살 사건" 등 베트남 민간인 학살 등의 만행 또한 있었으니...

 

전쟁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인간이 인간에게 주는 최대의 고통...  

 

 

복도에서 진정시키고 있었더니 남푠과 아이들이 나왔다.
눈물 많은 엄마... 아이들은 엄마의 눈물을 보면서 전쟁의 참상을 더 공감할 수 있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치르는 동안 수많은 인명피해와 2,000억 달러에 가까운 비용을 썼다고 한다. 세계 경제를 주름잡던 미국의 막강한 힘도 베트남 전쟁에 너무 많은 돈을 쓰면서 차츰 약해지기 시작했고 미국 대통령인 닉슨이 아시아의 전쟁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닉슨 독트린"(1969)을 발표하고 1973년 말에 베트남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미군이 떠난 뒤 남베트남 정부는 1975년 4월 30일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에 무조건적 항복을 하고 말았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이 사상 처음으로 패배한 전쟁....

 

 

베트남 전쟁박물관은 전시물도 볼거리도 어마어마하게 많았지만....

 

 

나는 가슴 아파서 더 이상 관람을 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과 아빠는 나가서 포로 수용시설 등등도 둘러보았다고 한다. 

 

 

야외전시실.... 
여기서는 함께 베트남전 당시에 쓰던 전투기, 탱크, 헬기 등을 둘러보았다.

 

 

1호가 동생에게 탱크의 바퀴와 무한궤도 작동원리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중

 

 

난 전쟁 무기를 보는 것보다...
평화로운 호치민의 초록초록을 보는 게 더 좋았다. 

 

 

마치 전쟁을 겪은 듯...
참혹한 모습을 보고 온 뒤라...
초록의 싱그러움이 더욱 감사하게 느껴졌다. 

 

 

호치민 전쟁박물관 · Phường 6, District 3, Ho Chi Minh City 700000 베트남

★★★★★ · 전쟁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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